취득원가와 시가의 싸움, 이는 특정 시점에 자산과 부채에 대해 회계처리를 할 때 자산과 부채를 취득할 당시의 금액인 취득원가로 기록할 것인지, 아니면 재무제표를 작성할 당시의 시가로 재평가해서 반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근을 판매하는 상인이 연중에 1개당 1,000원에 당근을 취득했는데 연말에 당근 값이 폭등하여 1개당 2,000원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때 재무상태표를 작성한다면 당근의 가치를 장부에 반영하면서 취득 당시 가격인 1,000원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장부 작성 당시의 시장가치인 2,000원으로 해야 할까요?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시가가 맞을 것 같고, 돌아서서 생각하면 판매하기 전의 가치는 유동적이기 때문에 취득원가로 반영해야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다 보니 어느 금액을 장부에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꽤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1800년대에는 회계처리에 명확한 기준이 없었으므로 자산 가치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재고자산, 부동산, 기계장치 할 것 없이 시가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시가평가는 정확하지 않아서 실제 가치보다 높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하자 그 책임소재를 놓고 부실한 회계처리, 그중에서도 특히 부풀려진 시가평가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결국,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대공황 이후 GAAP을 정립하면서 취득원가를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1934년 취득원가가 회계상 가치평가의 원칙으로 채택된 이후, 이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30년 이상 유지되었습니다. 자산 가치를 부풀리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는 취득원가 원칙이 불가피했습니다.
가치평가 기준에 다시 논쟁의 불씨를 지핀 것은 바로 1970년대에 발생한 오일쇼크와 그 이후 일어난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1973년 10월,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던 중동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습니다. 중동국가들은 전쟁에서 명확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석유 가격을 인상해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는 이른바 석유파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유가는 1년 만에 4배나 올랐습니다. 1978년에 이르러 유가가 진정되나 싶었으나,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석유 시장의 15%를 차지하던 이란의 석유 수출 금지는 세계 경제에 극심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오일쇼크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을 동시에 불러왔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었습니다. 유가 상승으로 인해 물가가 계속해서 상승하자 이로 인해 경기가 침체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이어져 온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회계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930년대부터 유지해온 취득원가주의 가치평가가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인플레이션이 되면 장부에 기록된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실물의 가치는 점점 올라갑니다. 화폐 가치가 바뀌면 회계장부에 기록된 정보는 실제 가치와 점점 멀어집니다. 어쩔 수 없이 통화가치와 물가변동을 회계에 반영하더라도 시장 심리에 따라 가치가 쉽게 달라지기 때문에 회계장부는 진정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손상차손'입니다. 손상차손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산의 진정한 가치를 구해 그 가액이 장부가액보다 현저하게 낮아진 경우 그만큼을 손실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취득원가주의를 버리지 않으면서 시가평가를 일부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FRS 회계에서는 손상차손 평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대부분 자산에서 손상징후, 즉 시장가치가 급격히 하락해 미래의 경제적 가치가 장부가격보다 현저하게 낮아질 가능성이 있을 때 가치하락 예상금액을 미리 장부에 반영해야 합니다. 손상차손의 핵심은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자산의 장부가액이 해당 시점에 실제로 판매한다고 가정할 때 회수 가능한 금액보다 더 많게 표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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